저는 기독교를 믿는 여고생입니다. 저희 할머니의 종교는 불교인데, 불교를 믿어야만 천상에 갈 수 있다고 자주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천당이나 불교의 천상이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둘 다 이상향, 또는 즐거움만이 가득한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천당이나 천상, 이것은 도대체 어떤 세계인가요?

 

객관적으로는 환상으로 이루어진 곳이라고 보아야 하고, 주관적으로는 극치의 행복을 누리는 곳이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 천상이 환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부딪치고 깨지고 아프고, 무너지고 깔릴 것이고, 또 불행하다면 극락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그렇다면 이제 천상을 가보고 싶은 그대들이 모여 있는 이곳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곳은 첫째로 세상과 둘째로 세상을 느끼는 몸과 셋째로 행복과 불행을 판단 짓는 생각 즉 정신이 만난 자리다. 이 셋 중에 세상이란 만유가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고, 만유의 공통점이며 재질이 되는 것은 여섯 가지 즉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뜻(이름으로서의 의미)이 전부이니 이 여섯 가지는 감각기관 즉 오관과 심정으로서만 느껴질 뿐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색은 빛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실체가 환상과 같고 소리란 허공의 울림이므로 허공과 다름없다. 냄새란 허공이 되기 직전의 극 미립자이고 극 미립자는 현대과학에서의 전자와 같으며 전자가 쪼개지면 빛이 되므로 곧 색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물질이란 그 실체가 없으며 역시 맛이라 하여도 혀가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미묘한 현상이므로 역시 있다고 할 수 없다. 감촉 또한 닿아서, 즉 만나서 생겨나는 느낌이므로 번갯불과 같다.

즉 불과 손이 만나 생겨나는 감촉은 뜨거움이고, 쇠와 손이 만나 생겨나는 감촉은 단단함이라는 느낌이지만 이 느낌이라는 것은 손이 없어도 있을 수 없고 불이 없어도 있을 수 없으며 쇠가 없어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둘이 만나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뜨거움이란 손도 아니고 불도 아니듯 역시 단단함이라는 느낌도 그저 둘 사이에서 생겨난 정신의 느낌일 뿐 쇠도 아니고 손도 아니므로 구름과 구름 사이에서 생겨난 번갯불이나 천둥처럼 곧바로 간 곳 없이 사라져버리는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물은 수소인 허공과 산소인 허공의 화합이지만 허공은 아무리 합해도 허공이고, 허공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사실은 만난 것도 아니니 단지 감각에만 느껴지는 허공이 곧 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세상을 이루게 되는 필수 요소인 물질과 감각 사이에는 중요한 법칙이 있으니, 세상이 ‘있는 것’이라면 감각은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거울에 색을 칠하면 다른 색이 비춰지지 않고, 눈에 빨간 안경을 끼면 이 세상의 흰색은 사라지며, 귀에서 소리가 나는 난청에 시달리는 사람은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니 눈이란 색을 보기는 해도 눈 자체에는 본래 색이 없어야 모든 색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고 역시 귀도 소리를 듣기는 해도 귀 자체에는 본래 소리가 없는 것이듯 실제적 감각기관이란 허공과 같아야 하는 것이다.

눈, 귀, 코 등의 작용이 멈춘 수면상태에서도 꿈속의 모습을 보는 눈이 있고 꿈속의 소리를 듣는 귀가 있듯이 육신으로 이루어진 감각기관 이전에 정신적인 감각기관이 실제의 감각기관이며 정신은 허공과 같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므로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작용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과 세상을 느끼는 감각기관은 서로가 그 실체가 없는 환상의 어울림이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의견이다. 세상이 실감난다든지 아니면 이 세상은 공평하다든지 아름다운 곳이라는 등의 의견이 없다면 마치 ‘무뇌아’와 같아 세상의 모든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미는 환상적인 세상과 허공같은 감각이 화합됨으로서 드러나게 된 것이므로 세상이라는 아버지와 감각기관이라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과 같은 것이다.

부모가 개라면 자식도 당연히 개일 수밖에 없고 부모가 소라면 그 자식으로 역시 소가 태어나듯이 환상인 아버지와 허공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면 당연히 허깨비와 같은 것이 의견이라는 것의 실체고 세상은 감각으로 확인이라도 되는 것이지만 의견은 감각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더욱 허황된 이름의 나열인 것이다.

이러한데 이 세상이 천상과 무엇이 다른가?

모두가 환상으로 부딪치고 환상이 깨지고 환상이 무너지고 환상에 깔리고. 이러함을 깨닫는다면 그 깨달음은 과연 몸인가 세상인가 아니면 의견인가. 오직 마음에 이 세 가지가 모두 갖추어져 실감나는 꿈을 꾸는 것이니 정말로 죽는다고 오해해도 실제로는 실감나는 꿈이 정신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일 뿐이고 정신은 물질이 아니므로 생사를 초월한 것이기에 영원토록 다양한 세상의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천상을 ‘여기서’, ‘지금’ 느끼지 못하고 사후에 가는 곳이라 믿고 구하려 한다면 토끼의 뿔을 구하려는 것과 같고 석녀의 아이를 얻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간은 둘이 아니다. 일체 중생 즉 벌레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모두 지금 생각하고 지금 살며 지금 세상을 느끼고 지금 자라거나 늙으며 지금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도 ‘지금’일 수밖에 없고, 천상에 가도 역시 그 시간은 ‘지금’이다.

지금 속에 부처도 있고 해탈도 있으며 열반도 있을 수밖에 없으니 천상도 지금의 여기에서 얻어야 하며 지옥이라는 것도 지금의 어리석은 심정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 지옥과 천상은 실제를 깨닫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무엇을 말하려 하고 무엇을 궁금해하며 무엇을 구하려 하겠는가. 이미 진실이란 진실이 아닌 것이며 실제란 이미 실체가 없는 것이 실제인 것을.

이각스님, 『불멸(영원한 지금의 메시지) 』
도서출판 지혜의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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