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에서는 어떤 정체성을 가진 신(神)이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인도철학과 교묘히 섞이는 글들을 많이 접해 와서 그런지, 정확히 불교에서는 어떤 식으로 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불교에서는 신을 완전한 무(無)속성으로 보는지, 아니면 기독교와 같이 이타적 사랑으로 보는지, 혹은 인간으로서는 그 속성을 정의하고 가늠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정신(精神)뿐이다.

만약 정신이 ‘있는 것’이라면 만들어진 곳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정신은 ‘있다’ ‘없다’를 초월한 것이다. 유무(有無)라는 것은 단지 정신 속의 이름일 뿐이고, 정신 자체는 ‘물질’도 ‘비(非)물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정신은 오직 ‘지금 (只今)’이다. ‘지금’ 이란 정신없이는 느낄 수 없는 ‘찰나적 시간’으로, 과거나 미래의생각도 지금하고 나고 죽는 것도 지금 알며 만유가 변화하는 것을 아는 순간도, 서로 통하는 시간과 그렇다고 동의하는 생각 또한 지금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이란 ‘정신’과 그 재질이 같아서 유무(有無)를 초월한 것이기 에 잡을 수 없다. 잡으려는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지금’이고, 역시 잡으려는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지금’ 속에 들어있는 삼라만상인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뜻이라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그에 의한 고통이 오직 마음에 있으며, 참다운 마음이란 개아(個我)가 아니고 진아(眞我)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파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아(我)는 진아를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진아는 바다와 같고 개아는 파도와 같다. 즉,파도인 개아가 생겨나는 것은 바다인 진아의 능력이고, 바다에는 항상 파도가 생겨나듯이 진아는 반드시 수없는 개아를 만들게 된다는 의미다.

지금은 ‘정신’이고, 정신은 ‘기억(記憶)’을 가지게 되는데 그 기억의 뭉치를 개아라고 한다. 기억이 없으면 개아도 사라진다. 따라서 개아는 정신이 만들어낸 기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므로 정신이 곧 개아를 창조해 낸 진아인 것이다. 누군가 말하길 ‘개아는 스스로 존재한다.’거나, ‘개아를 빚어낸 다른 존재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잠이 들어 정신이 없을 때에도 나의 새로운 기억이 스스로 만들어지고, 또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제3자의 개입으로 기억이 결정지어진다는 말과 같다. 만약 신(神)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신은 지금(只今)에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일체 중생이 겪는 생로병사의 고통과 무관해지기 때문이다. ‘지금’을 벗어난 또 다른 시간이 있어 그곳으로 도피한 방관자라면 그는 더 이상 구세주(救世主)의 이름을 가질 수 없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중생을 떠난 신은 신이 아니다. 따라서창조주, 또는 절대자로서의 신은 결코 존재할 수없다. 그러나 신이 ‘지금’에 포함되었다면 그 정신 역시 진아를 수승하게 이해하고 있는 개아이거나, 진아와 하나가 된 개아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깨달은 자, 즉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진아를 바라보는 개아로서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모두가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벌레와 인간의 차이가 생기는 것 역시 그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속성은 원소기호에 불과하다. 원소기호는 각각의 물질이 가진 성질의 이름이다. 원소에 이름이 필요한 이유도 그 원소의 실체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허공의 성질과 같기 때문이다. 앞에서 여러 차례 설명하였듯이, 수소도 허공의 한 성질이고 역시 산소도 허공의 한 성질이지만 두 허공이 모이면 ‘물(H2O)’이 된다. 허공은 아무리 합해도 역시 허공일 수밖에 없으나 정신의 감각에 의하여 ‘물’로 보이게 되 고, 그것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개아의 수준이 결정되어 허망한 물질을 얻으려는 자(중생)와 허망한 물질임을 깨달은 자(보살)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으려 하는 마음에는고통이 따르고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에는 생로병사가 있을 수 . 없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정신에 의하여 인식되고 판단되며 그 가치가 부여된다. 만약 꿈에서 꿈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꿈속에 있는 자기의 몸을 진실하다고 믿어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공연한 수고로움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 몸을 지키려는 안타까움은 없을 것이고 그것이 꿈에서 자연히 깨어나게 되는 모습이니 쓸데없는 걱정에서 모두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현실(現實)’이라고 하는 의미는 물질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물질은 오직 정신에 의하여 그 모습이 드러날 뿐, 사실은 허공의 화합인 것이다. 나아가 허공 또한 정신에 의해 가정된 이름이니 일체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정신으로부터 드러나는 현상이며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정신이 곧 우주의 실체요, 우주가 곧 정신이라는 말을 의심할 수 없게 될것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은 찰나(刹那)를 견디지 못하고 변화(變化)한다. 찰나는 곧 ‘지금’이라는 시간이고, ‘지금’이라는 시간은 ‘찰나적 정신’을 말한다. 이 정신에 의해 기억되는 기억의 뭉치, 즉 추억의 무더기가 ‘개아’를 만들고, 그 ‘개아’의 수준에 따라 다시 ‘지금’에 드러나는 현상인 만유를 얻으려고 하거나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찰나마다 사라져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얻으려는 욕심만 더 커지니 오히려 악(惡)이 될 뿐이다. 그러나 ‘집착의 무릎’을 꿇고 그 원인과 실체를 바라보아 오직 정신의 작용임을 깨닫는다면, 삼라만상이 펼쳐지는 위대한 기계, 즉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깨달음에 환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해탈심(解脫心)’, 또는 ‘열반락(涅槃樂)’이라고 한다. 이것이 선(善)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천상(天上) 과 천하(天下)의 만유(萬有)는 신이 아닌 진아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고, 개아란 다시 ‘지금’인 진아를 이해하는 ‘정신적 수준’을 말한다. 이 진아와 개아의 모습을 정리하는 간단한 예를 들겠다. 온세계에 두루 차있는 허공이 있었다고 하자. 그 허공은 바람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언제나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날, 바람은 작은 집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바람이 집으로 들어가는 힘 때문에 문이 닫혔고, 바람은 집안에 갇혀 버렸다. 바람은 어느새 자신이 허공인 줄을 잊고, 이제는 창문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허공은 참 넓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자기가 본래 허공이었음에도 작은 집으로 들어와 창문을 통해 그것을 바라보며 ‘넓은 허공’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작은 나’라는 하열한 정신적 수준을 가지게 된것이다. 끝이 없는 진아가 작은 점인 개아를 만들어 놓고는 작아진 개아를 자기로 삼아 도리어 진아를 남으로 여기는 것. 이것이 진아와 개아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느 곳에 다시 신이 존재하겠는가. ‘지금’ 의 실체를 깨닫는다면 신의 존재를 논할 수 없게된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기복(祈福)의 종교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종교(宗敎)라는 말은 신(神)을 모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종지(宗旨)를 가르친다.’ 는 뜻이다. 종지란 더 이상 질문이 있을 수 없는 궁극(窮極)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므로 추측이나 회상이 아닌 실제인 ‘지금’을 말하는 것이다. 과거의 추억도 ‘지금’의 생각 안에서 회상되고, 미래라는 추측도 역시 ‘지금’의 생각 안에만 ‘실체가 없고 생사가 없는 정신의 움직임’으로서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육신(肉身)을 ‘나’로 삼게 된다. 육신은 찰나마다 생겨나고 사라지며 변화하는 것이기에 지킬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는 것인데 그것을 자기라고 깨달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을 자기로 삼은 꼴이 된다. 몸(身)이란 정신이 그려내는 찰나적 환상이다. 그것은 정신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몸이 있다고 믿기에 생사의판단을 내리게 되지만, 이는 오직 정신에만 있는 이름인 것이다. 살았다고 하는 것은 ‘정신이 있다’ 는 말이고 죽었다고 하는 것은 ‘정신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시체(屍體)’에는 정신이 없으니 생사의 판단이 없다. 반대로 생명체에는 생사의 판단은 있으나 지금 살아있으므로 죽음은 없다. 결국 죽음에도 죽음은 없고 삶에도 죽음은 없으나 단지 생각의 판단에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생각이란 생사를 초월한 정신의 움직임이므로 실제로 생사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중생은 얻을 수 없는 자기를 얻으려 노력하므로 고통을 피할 수 없고, 고통이 있으므로 그것을 해결해 줄 신을 찾게 되니 그로 하여금 많은 종교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불교만이 ‘종교’, 즉 ‘궁극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는 신이 있다고 가르치는 부분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한 불교인들에 의하여 불교는 기복신앙의 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능가경(楞伽經)』에서는 신을 믿는 자나 아니면 신이 있다고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외도(外道)이며 외도의 스승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파도가 곧 바다고 바다가 곧 파도를 드러낸다.
중생이 곧 부처고 부처가 곧 중생을 드러낸다.
일체의 세상은 각각의 생각 속에 들어 있고 생각의 주인공은 ‘나’이니
내가 세상의 주인이고 유일한 정신이며 신(神)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불멸1, 계간 지심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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